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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람들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승인 2017.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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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CE]
 

   
 

울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눈부신 빛과 하늘의 음성으로 자기를 말에서 고꾸라지게 했다고 증언했다. 베드로는 변형된 그리스도를 목격했는데, 바울 또한 영화된 그리스도를 보았다.

정말로 놀라운 점은 바울이 얼마나 성숙하게 자기 신분을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은 자랑했지만, 그의 자존심이 아니라 그의 복음을 변호하려고 그리했다. 바울이 섬겼던 이방인들이 그의 이력을 신뢰하는 일이 꼭 필요했던 까닭은, 복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영적인 고아에 불과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고 말했고 영적 아버지의 역할을 진지하게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고 권면한 것이다. 당시는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이라 그들은 복음서를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유일한 방식은 바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거만한 특권층 (백인) 남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일러주는 행습에 갈수록 더 민감해지는 문화라서, 바울이 종종 달갑잖은 속성인 온정주의(가부장주의)를 보이는 자로 비판을 받곤 한다. 바울의 말이 우리에게는 온정주의적―권위주의적이고 보스 티가 나는―으로 들릴지 몰라도, 그의 청중에게는 아버지다운 충고―자애로운 아버지의 교훈과 지도를 베푸는 것―로 들렸을 것이다. 바울은 진정 진심으로 그의 회심자들을 영적인 자녀로 생각했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느낀 불만은 단지 신학적 논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좋은 부모가 다 그렇듯, 바울도 그의 자녀들의 영적 건강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바울이 그의 동료들과 회중이 복음과 일상생활에 대한 함의를 온전히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들에게 욕구불만을 느끼고 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더 잘 납득하게 된다. 바울이 “나는 사도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내가 중요하다”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미세한 차이일지 몰라도 분명히 중요한 차이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의 청중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를 좋아하는지 여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를 신뢰하는 것만은 꼭 필요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성격 때문에 다수의 추종자가 생겼으나 가까운 친구는 소수밖에 없었고, 그의 시선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앞에 놓은 상급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이 자기 자랑을 일삼았으니 얼간이로 보일지 몰라도, 고대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 관계collegiality에 대한 현대식 사고방식으로 바울을 판단하는 것은 공종하지 않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바울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좇을 수 있는 믿기 어려운 모범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랜돌프 리처즈와 브랜든 오브라이언의 바울과 편견(성서유니온)에서 뽑은 글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성서유니온에 있으며, 성서유니온의 허락을 받아 싣는다. CTK 2017:9

 

랜돌프 리처즈, 브랜든 오브라이언 E.Randolph Richards, Brandon J. O'brian

<저작권자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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