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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

기사승인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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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S 행가래
 

는 “핫”하다. 며칠 새 권역외상센터 지원 청원운동에 20만 명이 참여했다. 예산 국회는 여야 없이 그의 뜻을 받들어 212억 원 증액으로 화답했다. 전년 대비 53퍼센트 증가한 수치다.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후원금이 쇄도했다. 추운 겨울이 갑자기 따뜻해졌다. 이국종 교수 이야기다. 그는 2011년에도 소말리아 해적에게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수술해 “아덴만 영웅”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번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귀순 사건에서 귀순병사 오씨를 치료하며 국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를 핫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의 결기를 그에게서 보아서일까? 그 스스로 고백한 “지잡대 시골의사”의 역전 드라마를 보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여름날 시원한 냉수 같은 사람 냄새를 그에게서 맡아서일까? 뜻밖에도 그가 세상을 움직인 것은 ‘언어의 힘’이다. 그의 소통방식은 분명 달랐다. 쾌도난마의 언어는 시원했고 날카로웠다. 칼잡이다웠다.

“당시 북한 병사는 마치 깨진 항아리 같았다.”

과다출혈로 치명적 상태를 놓인 그 북한병사를 두고 이교수가 CNN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언어는 사람들의 뇌리에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칼을 쓰는 사람’으로 말한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두꺼운 책을 많이 쓰는 것보다 일생 동안 한 가지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대체 그는 어떻게 언어학습을 하고 소통의 방식을 익혔을까? CBS ‘김현정의 뉴스 쇼’에 출연해 나누는 대담에 그의 소통방식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는 말한다. “제가 해체하는 순간 피가 뿜어져 올라오거든요. 다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 수술해야 되는데…1퍼센트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무조건 열고 들어가야 되는 게 이 외상외과 의사들의 숙명 그리고 외상센터에서 근무하는 모든 의료진의 숙명 같은 거기 때문에 저희가 거기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어떻게든지 끝까지 정말 있는 힘을 다해야 되는데 그러다 보면 당연히 높은 사망률은 저희가 안고 가야 됩니다.”

솟구쳐 오른 피, 뒤집어 쓴 피, 물러설 수 없는 비장함, 마치 생명을 구하려 불속에 뛰어드는 소방관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낸다.

이 교수는 의료 시스템도 의학세계 너머의 용어를 차용하여 설명한다.

“병원에 오면 병원에서 들여다보시는 게, 병원 겉에 있는 대리석 스테인드글라스. 요새 병원들 외형이 얼마나 좋습니까? 번들번들한 대리석으로 까는 바닥. 그 바닥 매일 닦습니다.” 그러면서 일갈한다. “병원 바닥 닦아서 나아지는 건 없습니다.” 그림언어는 이미지를 그려낸다. 잘 박힌 못과 같다.

시인 이시영은 이렇게 소원한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이시영 〈시〉

 

대체 바람 속을 뚫고 과녁에 박혀 가슴을 후벼 파는 언어는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설교학자 프래드 크래독 목사는 마음의 화랑에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

이 교수의 그림언어는 군복으로 정점에 이른다. 청와대 인왕실, 해군 정복을 입은 그는 대통령 앞에서 관등성명을 댔다.

“소령 이국종!”

대통령의 가슴을 후벼 팠을 것이다. 국군통수권자라는 글자를 새기며 파르르 떨었다. 그의 그림 언어는 절묘했다. 상식의 허를 찔렀다.

준비된 자리만이 아니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북한 병사는 자신이 있는 곳이 아직 북한인지 불안했다. 이 교수는 벽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저 태극기를 한번 보라. 저 국기를 북한에서 본 적이 있느냐.” 그렇게 북한 병사를 안심시켰다.

그의 언어에서 소설칼의 노래가 떠오른다. 이순신은 말한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언어학에서는 대구법이라 한다. 어조가 비슷한 문구를 나란히 두어 문장의 변화와 안정감을 주는 표현법이다. 대구법은 반복을 통해 말에 ‘아름다움과 힘’을 더한다. 의미를 강화시킨다. 강조가 일어난다.

칼잡이 이 교수의 언어가 그렇다.

“그냥 지냅니다. 그냥 잘 지냅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말도 못하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대구법을 알면 그림언어와 함께 쌍칼을 쥔 언어의 검투사가 된다. 성경은 이런 대구법으로 넘쳐난다. 대구법은 성경의 기본언어이자 절대언어라 할 수 있다.

“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같이 튼튼하구나.”(욥41:24)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여호와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13:1-2)

나는 안다. 세상은 이런 언어들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을. 내 말에 새 옷을 입히고 싶다. 아니 새 옷 입은 말이 환하게 웃으며 손짓하고 있다. 새해다. CTK 2018:1/2

 

송길원 CTK

<저작권자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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