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28
default_setNet1_2

누가 나의 디지털 이웃인가?

기사승인 2018.09.27  

공유
default_news_ad1

- 그리스도인은 이웃사랑을 말하지 않는 양극화된 정치 담론들을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 민주주의는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 게임으로 여겨진다. 이 게임의 선수들은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들이며,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정치를 두고 논하자면, 합의를 끌어낸다거나 타협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으로 보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가 탈-진실post-truth정치의 시대로 변해버렸다고 종종 비판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똑같은 정치가 또한 탈-이웃post-neighbor 정치가 되어버렸다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승리란, 승리한 쪽이, 비록 그 승리가 근소한 표차의 승리라 하더라도, “국민의 뜻”을 독점하게 되고 그들의 논리와 애국심과 진보가 곧 ‘다수’의 뜻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패배한 쪽은 곧 일종의 비-국민non-people이 된다. 패배자들이 그들의 ‘소수’ 의견을 계속 주장하면, 그들에게는 “애국심이 없는 불평불만분자”에서 “국민의 적”까지 다양한 낙인이 찍힌다. 바로 이것이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움직이고 있는, 그리고 때때로는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저 존재하는 그런 문화이다.
 

승자독식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물론, 성경의 이상은 아니다. 비록 성경이 사회 정의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사회를 어떤 특수한 제도에 맞추어 조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역사적 의미에서, 고대 아테네식의 민주주의는 기독교보다 약 5세기 앞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회 질서의 최선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인 논쟁들―민주정치나 군주정치냐 귀족정치냐―은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불변의 배경이 되어왔다.

기독교의 유구한 (정치적) 역사에는, 성경은 비록 국가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한 목소리로 모든 국가를 향해 권력자들은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한다는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로마에서부터 칼뱅의 제네바와 현재의 워싱턴 DC와 런던에 이르기까지 흐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정치적 신앙을 갖고 있다.

오늘, 서구 기독교는 민주주의의 쉼 없는 발전에서 가장 최신의 단계―다수 지배를 두고 벌이는 경합으로서의 대중 민주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 게임은 다수의 입장을 “국민의 뜻”으로 치환하기 때문에, 다수의 지위―선거든 사회여론이든―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게임 자체가 유권자에게 선택의 자유―외부의 간섭 없는 투표, 곧 유권자의 독자적 입장―를 보장한다. 이것은 승리를 정말 달콤하게 만든다. 이때 유권자는 자신이 이기는 말에 돈을 걸었다는 희열을 느낀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빅 데이터 기업과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미디어 자이언트를 집어삼킨 최근의 스캔들이 정치 담론의 이러한 승자와 패자 낙인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버렸다. 수백만 페이스북 유저들의 개인정보가 그들의 동의 없이 수집되었고, 짐작컨대 그들을 조사하고 분류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뉴스 피드를 맞춤형 이념 에코 룸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우려하는 바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조작한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투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우리는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에 확신했던 것만큼 그렇게 자유롭게 선택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고통스런 자각을 하게 되었다. 매우 음침한 어떤 실체를 우리가 자각하면서 국민의 뜻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산산이 깨졌다. 온라인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우리에 관한 상상불가의 정보량을 축적한 다음에, 돈을 대주는 쪽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 정보를 사용하여 우리를 감언이설로 속이는 음흉한 빅 데이터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듣고 살아온 자유의 내러티브―우리는 경주의 주체players이다―는 전복되었다: 우리는 경주의 대상being played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반응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직접적이고 어려운 질문은 “페이스북을 지워버려야 하나?”이다. 실제 세계에서 만큼이나 온라인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된 세대, 소셜 미디어 원주민들social media natives에게 이것은 확실히 키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의 위기이다.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이 질문을 확장하여 우리를 이 지점까지 이끈 공공 담론의 종류―우리의 승자독식의 대중 민주주의 스타일―까지 검토해야 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분파들의 관계를 다수 획득majority dominance을 위한 이기느냐 지느냐의 경쟁으로 쉽게 바꾸어버리는 우리 시대의 성향이 막강하고 비도덕적인 빅 데이터 산업을 만들어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버림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기기 위해 모든 가용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제로섬 현실이 정치 지도자들을 부추겨 자신의 의지를 “국민의 의지”로 바꾸기 위해 빅 데이터의 힘을 이용하게 한다.

성공회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가 2016년에 처음 발표하고 2017년에 더욱 발전시킨 주장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은 현대 미국 대중영합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였고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의 영국 정치에 초점을 맞추었다, 2016년 6월의 국민투표에서 영국 유권자의 51.9퍼센트가 유럽 연합을 떠나는 선택을 했을 때,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잔류파 정치인들은 비애국적 인사, 반민주적 인사, 어떤 경우에는 “국민의 적”으로 조롱 받았다. 이러한 창피주기 현상을 비판하면서 윌리엄스는 오늘의 정치가 어떻게 우리를 선동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우리가 패배시켜야 하는 사람들로―보게 만드는지 지적했다. 이런 정치와 달리 기독교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먼저 이웃으로 보라고 도전한다고 윌리엄스는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정치 담론 스타일보다 더 건강한 정치 담론 스타일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핵심을 간파하는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낙태 지지와 안락사 지지 사회에서, 이러한 쟁점들에 반대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지자들에 의해 어떤 취급을 받는가?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여겨진다면,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얼굴이 배제된다면, 그리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신념을 포기하라고 강조 받는다면, 그런 민주주의는 허약하기 그지없다. 전통적 결혼, 생명의 권리, 또는 종교적 자유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소수의 신념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다수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병든 민주주의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국민”이 되려고 경쟁하는 이러한 병든 민주주의는 소수 역시 국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디지털 선한 사마리아인

윌리엄스의 논리를 밀고 나가면, 더 나은 종류의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의 이웃을 사랑하고 민주적으로 부여받은 책임을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발휘하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물론, 승자들이 선거 승리를 트로피가 아니라, 모든 시민들―그들이 투표한 것과 다르게 투표한 사람들을 포함한 시민들―의 선을 증진하기 위한 임명장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정치적 이웃들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한다는 데서 우리의 사고를 시작될 때, 승자와 패자의 언어는 어색한 말이 된다.

비록 기독교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는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이 시대에 기독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승자와 패자의 경쟁을 이웃됨의 경쟁을 위해 의지를 다하여 포기하라고 도전한다. 이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전문 보기: 누가 나의 디지털 이웃인가?]
 

제임스 이글린턴 에든버러 대학교의 개혁 신학 맬드럼 강연자
James Eglinton, “Who is My Digital Neighbor?” CT/CTK 2018:9

제임스 이글린턴 James Eglinton

<저작권자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