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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먼저가 아니다

기사승인 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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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교회에서 가장 미묘한 우상숭배의 하나인 이것에 예수님은 어떻게 맞서시는가.

   
 

 
 

 

 

 

 

 

 

두려워 떨며 읽는 예수님의 말씀

가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기독교는 이내 예수님이 불편해질 것이다. 예수님이 가족에 대해 하신 말씀이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이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속단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7)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데, 이는 대체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이 살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길에서 사람들이 실제 십자가에 매달려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보는 ‘십자가’는 영적 헌신을 의미하는 편안한 은유일 뿐이다. 때로는 우리는 십자가를 삶의 스트레스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문구점 주인이 연말 재고 조사를 “내가 지고 갈 십자가”라고 내게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가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hate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

여름성경학교의 주제 성구로 이 말씀을 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혼식이나 결혼기념일 케이크 장식 글자로 쓸리도 만무하다. 이 구절이 조금이라도 어디서 언급된다면,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이 전혀 말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이 말씀에서 “미워하다”hate라는 말은 적대나 경멸이 아니라 애착의 우선순위를 뜻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해 줄 필요도 있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이 구절을 두고 “두려워 떨며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만 유익하다”라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다. 루이스의 표현대로, “자기 아버지를 쉽게 미워할 수 있는 남자, 자기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평생 몸부림친 여자라면 이 구절을 피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시간을 별로 갖지 않는다. 특히나 이 구절만 절대 동떨어진 본문이 아니라는 관점을 우리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왜 이처럼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pixabay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눅2:14)를 주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10:34-36)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주요 가르침에서 잠시 샛길로 빠진 부분이 아니라, 폭풍에 휩싸인 세상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10:38-39)―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으시는 방식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예수님은 일말의 공감도 보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눅9:59-60) 장래에 제자가 될 또 다른 사람이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1-62)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좋게 말해도 가혹하게, 나쁘게 말하자면 악랄하게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교집단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이것, 사교집단은 전형적으로 사람들을 가족과 단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신도들에게 부모나 형제들과 연락을 끊으라고 하는 집단은 유해한 집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다 보니 1세기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 운동을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자 어부 제자들은 즉시 그물을 내팽개치고 그를 따랐다.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손질을 멈추고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막1:20)고 전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를 가족과의 절연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물을 버리고 떠난 그 어부들은 다른 도시에 가서 새 직장을 구하는 현대인과는 다르다.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업으로 내려온 조상의 전통과 스스로를 단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후손과 그 후손의 후손, 앞으로 이어질 보이지 않는 세대를 위한 생계 수단까지도 포기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충격적인 반가족적 행위일 뿐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의 요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성경 이야기는 가족―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과 더불어 시작한다(창1:2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창17:5), 그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창15:5). 또한 다윗에게는 그를 위해 왕조를 세우셔서 그의 아들이 영원히 왕좌에 앉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7:4-17).

예수님은 그 어떤 상황과 문화에서도 놀랄 정도로 당신의 직계 가족을 방치하셨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가족 애착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그에 관한 가장 큰 논란거리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과 동족들이 그에게 보인 경악스러운 반응은 이상한 것이 없다. 그만큼 그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맞서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전문 보기: 가족이 먼저가 아니다]

 

러셀 무어 남침례회(SBC) ‘윤리와 종교자유 위원회’ 위원장. 이 글은 그의 Storm-Tossed Family: How the Cross Reshapes the Home(B&H)에서 간추린 것이다.

Russell Moore, “Family Isn’t First” CT/CTK 2019:1/2

러셀 무어 Russell Mo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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